나 자신을 뒤돌아 보며 | 김문경 | 2019-06-0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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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바울! 내가 나를 뒤돌아 보니,
그 중심에는 오직 내가 한 때 그토록 핍박했던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자리 잡고 있다.
뒤돌아 보면 나는 내가 아니었다. 정녕, 나는 내가 될 수 없다. 어떻게 한 사람 속에서 이러한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인간의 의지로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내게 들이 닥친 것이다.
내가 누군데?
내 이름은 사울이었다. 유대식으로 말하면 ‘여호와께 구하다’ 라는 뜻을 의미한다 지금의 나의 이름은 바울이다. 로마식으로 말하면 ‘작은 자’라는 뜻을 가진 이름이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그리스 헬라 문화의 영향 아래에서 줄곧 자라왔으며, 히브리의 종교적 요소는 나를 만들어 준 부정할 수 없는 비옥한 토양의 성분이기도 하다. 나는 또한 막강한 로마시민권(땅 끝까지 통하는 완전한 통행권)자이기도 하다. 유대인 혈통에서 태어났으며, 그 중 바리새인적인 교육은 나의 뼈와 살이 되어 오늘의 나를 이루고 있다.
나는 오직 자신의 신념이 지시하는 방향에 따라 그 길 위를 담대히 걸어가야 직성이 풀리는 그런 사람이다. 의지적 인식은 나의 모든 사고와 행동의 근원이 되며 그것은 나의 모든 정신적 자양분이 흘러나오는 샘물이 되기에 충분했다. 강직과 열정은 나의 성격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단어이다. 노한즉 추상같고 평상 시에는 온화한 봄날의 날씨가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내면의 온화함 속에는 예상을 뛰어넘는 벼락을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치밀함은 나의 조직적 두뇌에 바탕을 두고 있고 당당한 논설은 나의 입을 떠나면 누구와도 맞설 수 있는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온유함과 겸손함 밑에 숨어 있는 불 같은 나의 열정은 일단 뿜어져 나오면 용암의 분출처럼 뜨겁기 짝이 없어 땅을 태우고야 말았다.
나는 철저한 유대교 신봉자로서 당시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한마디로 세상에서 없어져야 할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다. 유대인으로서 누대에 걸쳐 이어 오는 하나님의 율법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오직 하나님만을 믿으며 그에게 의지하고 그를 통하여서만 죄사함과 깨끗함을 얻을 수 있다. 그 외에는 다른 어떤 것이 허용된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고, 명령하시고, 심판하시고, 구원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시며 그는 우리 유대 민족을 특별히 선택하사 자기 백성으로 삼으셨다. 우리 민족은 그렇다.
그러나 우리가 처한 현실을 보자. 한마디로 막막하다. 나라의 국토 회복은 어떻게 된 것이며, 다윗의 혈통을 따라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은 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 유대인들은 억압하고 핍박하는 저 로마 제국의 권세는 언제가 되어야 끝난 단 말인가? 이제는 메시야 그분이 그야말로 이제 우리들 앞에 당당히 모습을 드러내야 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 바로 이 말이다.
멋진 백마를 타고 천사들의 호위 속에서, 번개와 벼락 같은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위엄 아래, 너도 떨고 나도 떨고 우리 모두가 부들부들, 그걸 넘어 천지의 지축이 요동치는 가운데, 영광된 하나님의 증명서인 찬란한 깃발을 앞세우고, 사뿐히 보무도 당당하게 그 메시아가 땅에 접지하는 순간,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저가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세상의 모든 권세자들, 세상의 모든 왕과 황제들, 세상의 모든 악행자들, 그리고 세상의 모든 떨거지들까지도 모두, 머리를 조아리고, 숨이 막혀 어쩔 줄 모르며, 어떤 놈들은 오줌까지 지려가며 있을 그 때에
심판, 이윽고 치리, 그리고 통치, 그 뒤에 한없는 이 땅의 평화, 값없는 구원, 하늘 나라로의 입성, 이어지는 영생
그런데, 저 갈릴리 근처에서는 한 때 보도 듯도 못하던 자가 거지 발싸개 같이 자기가 바로, 그 메시아라고 퍼트리고 다녔다며? 아니, 심지어는 지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사기치고 다니고 있었 다며? 그 초라한 행색의 새카맣게 젊은 자가, 지가 무슨 인생을 알며, 구약의 그 언약들에 대해 뭘 안다고 깝죽대고 나불거리며 다니고 있었는지? 아니, 뭐 전능자 하나님의 아들? 참, 나 원 참! 말문이 막히고 콧구멍이 막힐 일이지! 아니, 입이라고 뚫어져 있으니 뭔 말을 못할까마는 그래도 그렇지, 개뿔 목수 아들로 대패질이나 열심히 하면서 지 밥벌이나 할 것이지……
사실은 그 자가 떠벌리고 다닐 그 때에, 나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내가 당장에라도 거기로 달려가서 요절을 내고 끝장을 보았어야 하는데, 내 그러지 못했음이 못내 아쉽다마는
그러다, 그러다가, 그가 죽었다고? 그것도 비참하게 십자가의 형벌로! 그거야 당연하지, 암 당연하고 말고, 십자가 처형이야말로 그 작자를 위해서 고안된 거 아니겠어? 가만히 있자, 음~ 그런데, 간 자는 간 자고 요즘 가만히 보니 돌아가는 꼬락서니들이 가관이더구나.
아니,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처형된 그 자를 졸졸 따라다니던 그 몇 놈들 말이야. 뭐가, 어쩌고 저째? 그 놈들이 제 정신이 있는 놈들인가 말이다? 그 죽어버린 형편없는 자가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었고, 너나 할 것 없이 우리들이 기다리고 기다렸던 ‘메시아’ 가 바로 그분이었다고 함부로 주둥아리를 놀리고 다닌다는 말이지? 그러면 그가 진정한 우리들의 구원자요 구세주란 말인데, 그게 도대체 말씀이 되느냐는 것이다. 아이고, 아이구! 내 살다 살다 보니 참 별, 희한한 꼴도 다 보겠네. 십자가 아래에서 오금 한 번을 못쓰고 냅다 도망쳤던 그 놈들이, 아~이, 입 있는 사람들 말 좀 해 보시요! 그게 말이나 되고 가당한 일이 되는지? 내 그렇지 않아도 요즘 소화도 잘 안되고 잠도 잘 오지 않아 밤새 뒤척일 때가 많았는데…….
생각 좀 하고 삽시다. 생각 쫌….
지난 번에 감람산 저 편, 그러니까, 베데스타 연못 근처, 거기서 소위, ‘스데반 집사’라나 쨉사라나 하는 그 인간, 신성 모독죄로 심문할 당시, 내가 증인으로 선서를 했었네만. 참, 미망에 사로잡힌 인간들이란, 아니? 돌로 맞아 죽으면서도 뭣 잘났다고 웃으면서 죽어가는 건 대체 뭐냐는 거지? 얼굴 사방이 터져 핏빛으로 물들어 가는데도 저주는 커녕, 자비로운 얼굴을 하고 희미하지만 웃으며 기도 하는 가운데 죽더라니깐? 아니, 그게 사람 맞아?
철심장을 갖고 있고, 명료한 내 의지를 나침반 삼아, 나의 갈 길을 누가 뭐래도 당당히 걸어 간 나, 의지의 사나이, 신념의 사나이, 때로는 목표를 향하는 길 위에서 놓여 있는 방해물은 남김없이 비정하게 청소를 했고, 그 길을 향해 오로지, 얼음장 같은 신념에 오로지 의지한 채, 저 먼 미래에 생겼다는 그 무지막지한 마라톤인가 말라통인가 하는, 냅다 뛰기만 한다는 운동 말일세. 그 선수들처럼 앞으로 앞으로 전진만 했던 나인데도,
그 때는 쪼금, 야, 나보다 더한 놈이 있네? 이거 사람, 아니 인간 맞아?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거야? 하면서, 지금 비로서 말인데 그 순간 나도 약간 찔리기도 했었네만.
그런데 내가 누구인가? 그런 걸 보고 내가 흔들릴 사람같이 보이나? 염려는 붙들어 매시게나! 내가 누군데 그까짓 것 때문에 나의 신념이 흔들릴 사람인가? 그 자는 그렇게 죽어도 마땅한 자가 아니었겠나?
그런데 그런데 또 말일세!
그 후 한참 만에 ‘산헤드린 공회’에서 발급한 정식공문을 가지고 어딘가에 숨어 있다는 그 예수 쟁이들을 일망타진 하기 위하여 ‘다메섹’으로 향하던 때 그 어느 순간에 일은 벌어지고 말았네.
갑자기 강한 빛이 나의 눈을 강타했네, 그리고 나는 나도 모르게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져 엎어지 고 말았지 뭔가, 뭐야? 이거? 하고 눈을 뜨려는 순간 눈은 천근만근이고 하늘에서부터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는 소리가 들리길래 ‘주여 뉘시나이까?’ 하고 나도 모르게 '주여’를 외치게 되었지 뭔가? 내가 내 입으로 그 소리의 당사자가 주이며 구원자요 구세주임을 고백하게 된 셈이랄까? 거, 참! 아무튼 그리 되었네……
세상에는 사람의 힘만으로는 절대 생각도 못하는 그런 순간이 때로는 있는 모양이네, 내가 누군가? 아무리 나를 회유하고, 고문하고, 억 만금을 주고, 막강한 권력을 주며, 부귀영화를 약속한들 내가 눈 하나 깜짝할 인간인가? 애초부터 나라는 인간은 세상의 것들과는 관계를 지울 수 없는 그런 종류의 인간으로 태어났다고 말하면 이해가 될 런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독특한 운명이 나를 붙들어 매고 다니면서 그것이 나 로 나 됨을 만들었다고 하면 믿을 수 있겠나?
그 변화는 비록 외부에서 찰나와 함께 찾아 왔지만, 나로썬 내부의 혁명 그 자체이었네. 신념의 발원지를 향한 어두움 속의 자체 발광은, 마침내 나 자신의 신념의 강물이 흘러 나오는 그 지점에 거대하고도 환한 빛을 비추었네! 물이 흘러 나오는 잘못된 방향은 금새 그 밝은 빛에 의해 빠짐없이 하늘 아래 드러나게 되었고, 그게 얼마나 잘못된 일이고 창피하고 부끄러운 일인지를 그 순간 깨닫게 되었다는 말일세 그려! 흔들림과는 전혀 상관이 없던 나의 신념의 가치는 저 아래 구렁텅이로 급기야 추락해 버렸고, 편협하기 짝이 없는 조그만 망상은 드디어 자신의 왜소한 모습을 백일하에 드러내 보였네.
그것이 혹자들이 말하는 ‘바울의 회심’이자, 나 자신이 말하고 싶은 사도 바울로의 순간적이자 극적인 방향전환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내부의 혁명은 그런 모습으로도 갑자기 오는 모양이네, 조용함을 가장하고 오는 거지만 세상을 거대하게 바꿔버리는 그런 보이지 않은 모습으로도 말일세.
그 날 이후 나는 과거의 내가 아니었네, 비록 조용한 내부의 혁명이었지만, 나는 도저히 그냥 있을 수가 없었네. 나의 의지에 조그만 불꽃이 뛰긴 것에 불과하지만, 아니, 내 몸에 부싯돌이 갈아지면서 생긴 겨자씨만한 파편에 순간적으로 영원한 빛이 스친 것에 불과하지만, 나는 나로써 전혀 다른 새로운 나일 수 밖에 없는 그 무엇이 있었네.
지금 이 순간 나는 하늘 나라에서 평안히 거하고 있네, 그 사건 후에 세상에 있는 동안 겪어 낸 고통과 고난, 질곡은 새삼 말하면 무얼 하겠나? 오로지 신념에 붙들려, 아니지 하나님의 사랑에 붙들려,
믿음의 길 위에서, 신앙의 길 위에서, 선교의 길 위에서,
있었던 그 모든 일들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서 나온 것이며, 나의 나 됨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면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그런 것이었네. 오직 주의 사랑에 매어 나의 갈 길을 갔던 것뿐일세.
그것이 나로 하나님의 길 위에서, 오직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도록 이끌어 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나를 지목한 후 정하여 쓰신, 나의 길이었네.
마지막으로 총정리 함세.
예수 그리스도 그는 하나님! 그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으며, 그는 우리 모든 인생들의 대속자요, 구원자요, 구세주이며, 영원한 진리의 근원자이자, 창조주 자신이 되신다.
다만, 우린 그를 그렇게 인정하기만 하면 되는 것,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로 바로 곁에 있는 그 단순한 진리에 손만 잡으면 된다.
너무나 쉽지만, 그걸 선택하는 순간, 당신의 과거, 현재, 미래 아니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과의 극적인 화해가 이루어지며, 영원을 소유하는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 버린다.
선택은 그대의 자유다!
김문경 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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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새벽별 2019.6.11 17:50
바울 입장에서 회심이 어떤 것이었는지 잘 깨달아지는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