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의 고백 | 김문경 | 2019-05-0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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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시몬 베드로!
내 비록 저 북쪽 조용한 갈릴리 호수에서
한 때 고기를 잡았던 이름없는 촌놈이었지만, 그대들도 잘 알다시피,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부활 승천하신 후, 천국의 복음을 온 열방으로 전하기 위하여 나머지 일생을 불꽃처럼
태웠던 사람이다. 이성보다는 항상 감정이 앞으로 먼저 튀어나와
애를 종종 먹었으나, 그건 타고난 나의 기질 아니겠는가? 내가 딱 질색인 사람은 소위 뭉기적거리는
인간들이다. 튀어 나와야 할 순간에 왜 뭉기적거리냐고? 확 튀어 나와서 뭔가를 보여주어야 할
것 아니겠는가?
하긴,
나도 그동안 고기 잡을 때에는 성질을 죽이고 끈질기게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나도 필요할 때는 은근하면서도 지칠 줄
모르게 숨을 죽여, 나의 진득함을 보여줄 수 있었다니까. 고기 잡을 때만큼은……..
사람을 항상 뭘로 보는 게야?
그건 그렇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예수님 제자 중에서 나보다 변화무쌍한
행동거지를 보인 사람이 또 있을까 싶기도 하다. 감정의 기복은 그렇다 치고, 때론 격하다 못해 일을 저지르기도 했다. 바로 검은 비로도로 온 세상을 덮어 버린
듯 칠흙 같던 그 날, 감람산 어느 올리브 고목나무 아래 구석진
곳에서, 감히 예수님 앞이었건만 칼을 휘둘러 사람의
귀를 댕강 잘라내질 않았나, 그렇게 철떡 같은 내 입술의 약속이 살아
있었건만, 순간 무너져 내린 그 허망함은 나 자신에게도
잘 설명이 되지 않는 부분이기도 하다
인간의 나약함이 다른 사람이 아닌 나
자신에게서 적나라하게 들어날게 무엇이란 말인가? 왜 하필 나였더란 말인가. 이건 창피를 넘어 추악함에 가까운 것이니, 도저히 맨 낯으로 다니다가는 화끈거려서
얼굴에 화상이라도 입을 지경이다. 그렇다고 온 나머지 생을 방구석에 틀어박혀서
혼자만 살 수도 없고! 아 참,
저 21세기 언제쯤에는 과학이 고도로 발달하면
FACE-OFF 기술도 나온 다는데, 그 때까지 살 수도 없는 일이고. 사람이 미쳐 버린다는 걸 이제는 좀 알
것 같다. ‘멘붕’ 알지? 요즘 너희 나라 개그맨들이 자주 쓴다는
멘탈 붕괴! 그네들은 그저 웃자고 하는 소리가 분명할
테지만, 나에게 있어서 멘붕은 글자 그대로 정신줄이
순식간에 궤멸 되어 버린 그런 상태이었으니, 상상들 해 보시게나!
그 날이 문제였다. 아니,
그 밤 그 시각이 문제였다. 내가 대체 왜? 무엇 때문에 그 아래 뜰에까지 졸졸 따라가서 불을 쬐고 있었더란 말인가? 지금 생각하면 다른 제자들처럼 아예 도망가
버렸더라면 차라리 좋았을 것을 왜? 뭐가 그리? 중뿔 났다고 거기까지 쫓아가서 그 언저리에서 병신같이 서성댔단 말인가?
차라리,
예수님 옆으로 바짝 따라갔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백 번 천 번, 평소의 나였더라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날은 내가 왜? 그랬을까? 나는 지금도 그걸
이해할 수가 없다.
평소의 내 성격대로라면, 난 당연히 예수님 바로 곁에 있었어야만
했다. 왜냐고? 난
12제자들 중에서도 늘 한다면 하는 놈이었고, 다른 제자와 예수님까지도 그걸 인정해
주고 있었으니까. 나야말로 나름대로 리더십도 있었고 내가 나를 생각해 보아도 평소엔 성질이
좀 급한 편이이어서, 예수님으로부터 자주 책망을 듣기도 했었네만, 나름대로 예수님으로부터도 든든히 신임을
받고 있었으니까.
그 순간 중심으로 확 치고 들어갔어야
마땅한 나인데 도대체 왜 주변에서만 맴돌았었단 말인가? 다른 건 몰라도 믿음으로만 본다면, 진리 안쪽, 그러니까 그 중심부로 뛰어들지 못하고, 주변에서 서성거릴 때에는 반드시 어둠의 세력들은 사람을 가만히 놓아주질 않는 게 분명하다.
그 날 내가, 예수님 바로 곁에서만이라도 따라갔었더라면, 구레네 시몬이 대신 지고
갔던 그 십자가는 내가 지고 갔을 것이 분명한데, 그러지 못한 것이 지금 천추의 한이 된다. 그런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나인데,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날은
정녕코 나한테 저 어둠의 세력들이 짝 달라붙어 나 모르게 장난질을 한 게 틀림이 없다. 이제 와서 핑계라면
핑계일 수도 있고, 또 핑계를 댄다고 모든 게 원상으로 복구되는 것도 물론 아님을 나 자신도 잘 알고
있네만.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나도 어쩔 수 없는 나약한 한 인간에
불과하였나 보다. 그런 외면적인 강인함 뒤에 웅크리고 있었던
나의 인간적 나약함이, 대담함보다도 먼저 뒤로부터 황급히 앞
줄로 새치기 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변명 같지만, 그게 사실이다.
아니지,
내가 이러면 안되지? 여기서 일의 선후를 있는 그대로 자세히
이야기 하는 것이, 나라는 인간을 이해하는 데 더 도움이 될 것 같다.
사실은 그보다도, 그 순간 옆에 있던 조그만 대제사장의 시종 여자아이의 맹랑한 추궁(?)이 문제였다. 고놈의 당돌한 여자 아이가 나를 쳐다보는 순간, 나의 이 비겁한 눈이 어쩔라고 그 아이 눈을 정면으로 보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사실 그것이 나로 하여금 그 자리에서 얼어붙게 만들었고, 그 아이의 깊숙한 눈망울이 모든
걸 꿰 뚫어 버릴 것처럼, 약간의 비웃음 속에서 나를 한없이 직시하고 있음에, 나의 내부는 한없이 떨려 오며, 폭풍의 골짜기로 갑자기 내몰리는
기분이었다.
도저히 그 눈망울 앞에서는 달리 방도가
없었다. 그 야릇한 눈동자는 이윽고 내 내부를
온통 들쑤셔대다가, 급기야 악마의 불 섶으로 나를 이끌었고, 끝내는
거짓말, 아니 더 나아가 저주하며 맹세하기를,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라고 내 입으로 드디어 뱉고 말았던 것이다.
사람의 마음처럼 정처 없이 떠돌아 다니는
게 없다더니, 내가 그 꼴이 나버렸다.
떠올리기가 죽기보다도 싫지만, 말씀에 엄정히 기록되어 있으니 빼도 박도
못하고, 온 인류가 이미 다 아는 사실이니 말하면
무엇 하리요. 그리고 내 조그만 동상 앞에는 왜 항상
닭을 세워 놓는 거야? 사람을 병신으로 만들어도 유분수지, 아주 신났어요, 신났어!
한 번 실패는 병가지 상사다. 한번도 실패라는 단어와 상관없는 사람
있으면 당장 나와 보라고 해! 너는 한 두 번이 아니고 여러 번, 늘 그랬었다고? 실패가 어디 횟수의 문제냐고? 정도의 문제이지! 너처럼 엄청난 실수를 한 사람은 역사
이래 없었다고? 무얼 얘기 하려는 거야? 지금. 야, 이제
그만 하자, 그만 하자고!
(한 순간의 실수가 처절한 추락으로 끝난 그 날 늦은 밤, 내 기억 속에 낙인처럼 남아 있는 어린 소녀 앞에서 무너져 내린 그 한없는 깊은 몰락, 이 엄청난 죄악을 내 무엇으로 털어낼 수 있단 말인가?)
사람의 육신의 기질에서 나오는 생각과
의지는 참으로 허망한 것이니 비록 출발은, 진심일지라도 흔들거리는 감정과 기분에
따라 어느 순간 그것들은 옆 길로 새어 버린다. 인간의 입에서 난 어떠한 맹세도 신뢰할
수 없는 것이니, 육에서 난 것은 육일 뿐, 끝내는 좌절과 비참함이 자신의 것이 될 것이다.
내가 왜? 쓸데없이 이렇게 장황하게 변명을 하고 있는 것인지 나도 잘 모르겠지만, 그 후,
나의 내부에서는 비록 보이지 않았지만, 성스런 변화가 서서히 찾아왔었다.
핑계는 변명으로, 변명은 후회로, 후회는 참회로, 참회는 급기야 회개로 발전하였고, 이윽고 나는 그 사건으로 말미암아 예전과는
너무나 다른, 한 사람의 장엄한 신앙인으로 변했다.
이제 나도 할 말을 하자꾸나.
내가 내 일을 놓고 자화자찬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다만,
예수의 부활 이후 내 자신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너희들에게 여기서 조금 적어 보려고 한다, 큰
문제는 없겠지? 이러다가 인터넷인가 그 뭔가 온라인인가 하는 곳에서 난리 법석을 또 떠는 것은 아니겠지? 익명성을 앞세운 양몰이 작전, 마녀사냥을 한바탕 신나게 벌이려는
것은 아니겠지? 너희들 그 잘난 현대인들, 없는 사실, 확인도 아니 된 소문을 마구마구 확대 재생산하여 정말 무책임하게, 아무
거리낌도 없이, 죄의식이라고는 눈곱만 치도 전혀 없이, 이렇게
그렇게, 여기도 저기도, 신나게 뿌리고 다니지 말아라. 제발!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마.
예수 부활과 성령강림 사건 이후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명실상부한 리더는 누구이었으며? 성령강림 체험 이후 예루살렘 성전 앞에서 지체장애자를
예수 이름으로 치유한 자는 또 누구이었더냐?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부정을 칼 같이 치리 하던 나의 카리스마적
리더십은 또 무엇이었으며, 예수께서 다른 제자가 아닌 바로 나에게 직접 축복을 해주시면서 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한 말은 잊지 않았겠지? 아 참, 하나
덧붙일 게 있다. 말씀에 기록이 없어 나름대로 속상한 일이지만 서도,
내가 죽을 때 십자가에 꺼꾸로 매달려 장렬하게 죽음을 맞이 했다는 것 말이다. 나? 정말 고통의 극한까지 가보고 싶었다. 배신 당한 주님의 고통에 조금이라도
보답할 길을 다른 어떤 곳에서 찾을 수 없었기에 자청한 것이었다!
진정한 변화란 이런 것이다. 어차피 신앙인으로 거듭 난다는 것은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정리 하마!
나는 예수의 수제자였다. 그리고 위대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하나, 하나만 더 덧붙인다,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한 실패자는 없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엄청난 은혜이었음을 이제는 고백치 않을 수 없으며,
나의 나 됨은 오직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도우심 안에서만 가능했던 일임을 강조하고 싶다.
좀, 쑥스럽구만!
김문경 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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