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그 무거운 의미 | 김문경 | 2019-04-1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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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천국의 경계선에 위치한 십자가,
아득한 미지의 가물가물한 접경 지역, 이승과 저승의 안과 밖, 아득하거나 가장 확실한 지점, 거기 그 곳,
세계 모든 이성과 과학 그리고 철학까지를 다 동원한다 해도,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전인미답의 안개 가득한 거기,
두 세계는 거대한 굉음을 내며 충돌하지만, 너무나 조용하다. 모든 걸 빨아들이는 블랙홀 단추는, 세상 모든 소음을, 음소거 해 버렸다.
영 혼 육 중, 오직 영으로만 겨우 느낄 수 있는 곳, 거기 그 곳, 이승의 세계에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죽음이 결말로써 종결을 선언할 때, 비로서 잡힐 수 있는, 피안의 세계.
두 세계는 근원적으로 차원이 다른 세계이다. 시간의 길이를 과거 현재 미래, 그리고 사후 세계까지 그 영역을 늘여 놓고 논의되어야 한다. 가보지 못한 죽음 이후의 세계를 위해서라도 한번쯤은 반드시 고려하여야 하는,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로 그 영역이 확장된 후 비로써 받아 들여질 수 있는 믿음의 세계이다.
세상의 눈으로 하늘의 일을 어찌 볼 수 있으랴.
사람의 눈으로 세상 밖에서 본 십자가는 참으로 어리석고 미련하게 느껴질 수 밖에 없다. 전 인생을 걸고, 곰곰이 따져 보아야 할, 진지한 길이다. 십자가의 비밀은 믿음의 눈으로 본 후 그 안으로 들어가야 비로써 알게 되는 지혜와 영적 겸손의 아슬아슬한 길이다.
세상 사람은 오직 두 가지 부류로 나누어 질 수 밖에 없다. 십자가 안에서 존재할 것이냐? 아니면 그 밖에서 존재할 것이냐? 그 갈림길에 신앙이라는 믿음의 문제가 서있다. 단순한 선택의 문제이지만 절대적 결과로 귀결될 수 밖에 없는, 자유의지가 참으로 지혜롭게 택하여야 할 관문이다.
십자가의 길!
예수 그리스도가 고난 속에서 물리적으로 걸었던 그 길을, 모든 영혼들은 자기 삶으로 걸어가야 한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걷게 되는 길이지만, 뒤돌아 갈 수 없는 외통수 길이다. 육과 혼으로는 결코 볼 수 없는 영의 눈으로 보아야 비로서 보이는 길이다. 상식, 논리, 이성, 과학으로는 단연코 볼 수 없는 희미한 길이다.
좁은 길이다. 외로운 길이다. 미련한 길이다. 그러나, 결단의 길이다.
그러나 그 앞을 가로 막는 것이 있으니 바로 죄의 문제이다. 반드시 넘어가야 할 모든 인류의 개별적 난제…… “죄는 반드시 피로 씻어내야 한다”는 엄정한 명제는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참으로 버거운 것이다.
죄! 하나님을 거부하고 제 갈 길로 떠난 인간의 원초적 선택의 결과물이며, 죄성은 개별적인 죄의 결과가 아닌 본성에 자리잡고 있는 본질적인 결점이자, 저 화인 찍힌 하나님에 대한 반역행위이다., 근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하나님을 향한 불순종과 거역의 마음에서 출발한 것이며,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을 향한 적극적인 거부 행위로 모든 인간에 있어서 불행의 근원이 된다.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만큼 큰 죄는 없다. 몇 가지 계명을 어긴 것으로 끝나지 않고 적극적 반항의 태도를 표출하는 것이며, 이는 한낮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 인간들이 창조주 하나님에 대하여 자유의지를 기반으로 한, 야만적이고도 영원히 되돌릴 수 없는 무모한 행위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단지 믿음의 문제일 뿐이다. 내부의 어떤 종류의 혁명이 일어나지 않고서는 도저히 받아드릴 수가 없는 그런 것이다.
예수의 피로 물든 끔직한 십자가는 하나님의 극적인 사랑의 표현이며, 죽음과 절망의 상징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공의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의 거룩함에 비추어 볼 때 죄는 하나님과 결코 양립할 수 없는 것이며,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의로운 반응, 곧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노도 당연히 그 안에 포함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생들의 모든 죄와 잘못에 대하여 마땅한 징벌을 내리지 않으신다면, 어떤 의미가 되는 것일까? 두말할 것도 없이 그는 전혀 의롭지 않으며 그의 존재는 허망한 신기루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 땅에 만연한 선과 악을 설명할 수 있는 근거는 전혀 없는 것이 되며, 심판이라는 마지막 판결은 우리 인생들에게 내세울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게 된다.
“하나님이 어떠한 대가도 요구하지 않고 단순히 용서하시는 분이라면, 이것은 철저한 무관심이다. 이것은 옳고 그름의 구별을 말살시키고, 선한 것도 괜찮고 악한 것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다”(마이클 그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죄의 값이 얼마나 처절한지를 보여준다 모든 인생들의 시간을 초월한 죄의 총량을 감안할 때, 그에 대한 철저한 속량을 위하여서는, 영혼이 없는 동물의 피, 원죄로 오염된 사람의 피 이외에, 다른 적법한 방법이 존재할 수 없는 거대한 막막함이 있었기에, 인간이지만 죄에서 깨끗한 자,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스스로 창조자이신, 그 분의 고결한 피만이 그것의 유일한 해결의 길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서 잠시 구약시대에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는 모습을 보자. 희생제물을 죽여 피를 뽑고,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뜨고, 머리와 기름을 분리하고, 또 내장과 정강이를 물로 씻은 후, 그 모든 것을 단 위에서 불살라 번제를 드렸다.
특히, 유월절 하루 동안 제사장이 번제로 드린 양의 숫자는 무려 256,000마리였다고 하니 이스라엘 역사에서 예수가 이 땅에 오시기 전까지 거의 1,500년간 흘린 동물의 피의 양을 생각해보면 끔직하기 이전에 죄의 값이 그만큼 무거운 것임을 여실히 증명하고도 남는다.
당신이 그 제사장이었다고 상상해 보자.
야~이~ 나쁜 놈들아, 제, 제발 좀, 더 이상 죄를 짓지 말아라. 정말 지겹다. 지겨워~ 나, 아무리 제사장이지만 정말이지 이제는 사표를 쓰고 싶다. 너희들 말이다, 내 말에 잠시 귀를 기울여 보아라. 그 날 제단의 분위기를 짐작해 보란 말이다.
동물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뜨고, 살과 뼈를 분리하고, 피가 내가 되고 강이 되어 흐르는 걸 상상해 보아라.
그 피 비린내, 그 핏 빛 공기, 그리고 회막 문 앞 제단 사방에 뿌려진 검붉은 피 튀긴 자국들, 내가 아무리 성인군자라 해도 이윽고 얼굴에 나타나게 되는 무표정과 살기, 평소의 거룩한 모습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 아니겠는가?
아니, 내가 동물 죽이는 기계지 사람이겠느냔 말이다. 물론, 양은 죽음 앞에서도 순하다. 그러나 자신의 종말을 눈치채고 본능상 내게 몸을 맡기지만, 그 양의 몸을 통하여 느껴지는 은근한 발버둥을 생각이나 해보았느냔 말이다. 실은 그게 사람을 죽인다!
당연히 숙달된 조교이니까 한번의 망설임도 없이 숨통을 끊지만, 참으로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 나로 말하면 제사장이다. 하나님이 임명하였고, 하나님 앞에서 인간을 대표하며, 백성들을 대표하여 하나님께 나아간다. 너희들을 위한 중보기도는 물론이고, 하나님 이름으로 너희들을 축복해 줄 수도 있으며, 너희들을 위한 영혼의 중재자 아니냐? 그런 나에게서 피범벅이 된 나를 상상이라도 하겠느냐? 내, 이제 그만 하마. 축복을 말해도 부족한 내 입이 차마 더러워지는 것 같아서 말이다.
십자가는 그렇게 무거운 것이다.
김문경 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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